만해 한용운(卍海 韓龍雲,)
만해 한용운(卍海 韓龍雲, 1879~1944)은 시 「알 수 없어요」를 쓴 시인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개화기와 일제강점기를 꽉 채운 그의 생애는 독립운동가이며 불교개혁가, 사상가로서의 면모도
두드러진다. 본명은 정옥(貞玉)이고 용운은 법명이며 법호가 만해이다.
설악산 오세암에서 출가하여 처음에는 선수행을 하였고 블라디보스토크 등 시베리아와 만주를 떠돌면서
우리 민족의 현실과 세계의 동향에 비추어 불교계가 고여 있음을 깨달았다. 귀국하여 1910년에
『조선불교유신론』을 쓰고 백담사에 머물면서는 대장경을 우리말로 옮기는 작업을 하였으며
불교잡지를 간행하는 등 불교의 개혁과 대중화, 곧 불교의 현실화에 힘썼다.
41세 되던 1919년에 불교계를 대표하여 3·1 운동의 대표 33인에 참가한 것은
그의 이런 생각과 활동의 결과이다.
3·1운동으로 3년 동안 옥살이를 하고 나온 그는 불교대중화운동에 머물지 않고 민족자주자립운동으로서
민족경제를 살리려는 물산장려운동에 앞장서고, 나라의 대들보를 기르는 민립대학 설립도 역설하였으며
1927년에 통합민족단체인 신간회를 세우고 이끌기도 했다. 한편 문학가로서의 면모는 잘 알려진 대로
「님의 침묵「알 수 없어요」 같은 시나 「흑풍」 「죽음」 등의 소설로 드러나는데, 불
교 사상에 기반을 두고 당대의 현실을 고뇌하면서 독립을 추구한 그의 삶이
충청도 말씨와 부드럽고 섬세한 정서로 표현되었다.
말년에 서울의 성북동에 심우장(尋牛莊)을 지으면서는 남향으로 주춧돌을 놓자
“총독부 건물을 향해 집을 지을 수 없다”며 집을 북향으로 지어 버렸는데 이 집에서 독립운동의
비밀결사단체 ‘만당’을 조직하는 등 활동하다가 1944년에 69세로 눈을 감았다.
현재의 초가집은 옛터에다가 최근에 복원한 것이다. 기념식수와 안내판, 석비 들이
다소 어색하지만 그래도 바자울에 사립문이 있어서 퍽 정답다.
만해 생가지
만해사 사당
만해 영정
민족 시비공원
홍성 만해 한용운생가,사당,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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