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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효령대군

관악산 연주암

'억불 시대' 조선전기 불교 중흥 이끈 세종의 형 효령대군

연주대의 가을전경

관악산은 경기도 과천시와 안양시, 서울 관악구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수많은 등산객이 즐겨 찾는 서울 근교의 명산이다. 관악산은 경기 오악(五岳)의 하나이며, 연주암은 조계종 제2교구 용주사의 말사이다.

‘관악산 연주암지(1932)’에 의하면 본래 연주암은 677년(신라 문무왕 17)에 의상대사가 좌선하며 의상대를 세우고 그 아래에 관악사를 창건했다. 그 후 1392년 조선 태조가 의상대를 중창하고 ‘연주대’라 개칭했다.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 강씨의 오빠 강득룡이 조선 건국 후 관악산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1411년 효령대군이 관악사를 현재의 위치로 옮겨 40칸을 중건하고 약사여래상과 5층탑을 조성했다. 이후 19세기에 두 차례 더 중건됐다.

연주암에는 대웅전, 관음전, 영산전, 연주대(응진전), 삼성각(금륜보전), 효령각, 요사채, 종각이 있으며 3층석탑과 최근에 지은 십이지탑 등이 있다. 3층석탑은 고려후기에 조성된 특징을 보인다. 대웅전을 바라보고 왼편에는 종각과 효령각이, 오른쪽에는 요사채가 자리한다. 대웅전 뒤의 오솔길을 따라 오르면 삼성각과 근래에 세운 십이지탑이 있다.

1871년 과천현지도에 표시된 연주대와 연주암

◇연주대에 오르면=관악산은 서울 한강 남쪽에 위치한 소금강이라 일컫는 명산이다. 북한산, 남한산과 더불어 마치 솥같이 서울을 둘러싼 지형이다. 연주암은 관악산의 대표적인 사찰이며, 연주대는 연주암의 꽃이다.

경기도기념물 20호인 연주대는 관악산의 상징이다. 제일봉인 연주봉의 기암절벽이 연주대이다. 연주대는 기암절벽이자 암자로, 높은 산정에 자리한 연주암의 꽃이기도 하다. 연주대는 화강암의 수직절리가 탁월한 기암절벽이며, 절벽에 이십여 단의 석축을 쌓아 마련한 기도도량이다.

관악산 연주암에서 연주대까지 거리는 500m로 10분 정도면 오를 수 있다. 중간에 연주대 포토존에서 잠시 쉬며 연주대의 절경을 감상할 수도 있다. 여기서는 연주대와 그 아래 계곡에 복원된 관악사를 한눈에 볼 수 있고, 멀리 청계산이 보인다. 포토존을 지나면 정상에 있는 너럭바위의 차일암에 이른다.

조선지도 과천현도에 표시된 관악산

차일암은 장막을 쳤던 바위로 궁궐을 바라볼 때 작은 장막을 치고 앉았다 한다. 바위 구석에 오목하게 파놓은 구멍 4개는 장막의 기둥을 세웠던 흔적이다. 그리고 돌 웅덩이는 매염정(埋鹽井)이라고 하는데 기우를 위해 소금을 묻어 악산(岳山)의 화기를 잠재우기 위한 것이다. 관악산 정상석은 아주 너른 바위로, 가운데 자연석에는 ‘관악산 629m’라고 새겨놓았다.

이어진 불꽃바위를 지나면 바위를 깎아 만든 좁은 통로를 돌면 연주대에 이른다. 연주대 축대 위에는 1칸 규모의 응진전이 자리한다. 법당에는 석가모니불을 중심으로 미륵보살과 제화갈라보살이 좌우협시불로, 그 뒤로는 16나한상이 모셔져 있다. 응진전 옆 암벽에 마련된 작은 감실에는 약사여래입상이 봉안돼 있다. 특히 약사여래입상은 고려중기 불상의 특징을 보인다. 연주대 응진전에서는 새벽과 9시, 오후, 저녁기도가 하루도 빠짐없이 이루어진다. 산정에 위치한 기도도량으로 해남 도솔암이나 남해 보리암, 금강산 보덕암을 떠올리게 한다. 관악산 정상에선 맑은 날 북으로 개성 송악산, 서쪽으로는 인천 송도와 평택 당진간 서해대교를 볼 수도 있다.

효령대군 영정(경기도유형문화재 81호). 영정은 용상에 앉아 익선관 형태의 황색 관모를 쓰고 붉은색 홍포를 입고 풍채가 큰 효령대군이 정면을 바라보는 전신좌상이다. 얼굴표현은 정교하지 못하지만 치켜 올라간 눈썹과 봉황눈을 표현하고 있다. 오른손에 쥔 지물은 등채로 보이는데 지휘관이 들었던 지휘봉으로 본래는 채찍을 사용하다가 의례적인 장구로 변한 것이다. 조선전기 인물의 초상화가 극히 드물다는 점에서 여러 번 옮겨 그린 것임에도 그 자료적 가치는 높다.

◇효령각에 모셔진 효령대군 영정=태종이 셋째 아들인 충녕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자 효령대군(1396~1486)은 양녕대군과 함께 2년여 연주암에 머물며 연주암을 중창하였다. 유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회암사와 원각사를 일으키는 데 힘써 조선전기 불교 중흥에 큰 공을 남긴 인물이다. 이같이 불교를 숭상한 그의 행적은 오늘날 연주암에 영정이 남게 된 배경이 되었을 것이다.

효령각에는 효령대군 영정(경기도유형문화재 81호)과 신위가 모셔져있다. 영정은 용상에 앉아 익선관 형태의 황색 관모와 붉은색 홍포차림의 풍채가 큰 효령대군이 정면을 바라보는 전신좌상이다. 얼굴표현은 정교하지 못하지만 치켜 올라간 눈썹과 봉황눈을 표현하고 있다. 오른손에 쥔 지물은 등채로 보이는데 지휘관이 들었던 지휘봉으로 본래는 채찍으로 사용하다가 의례적인 장구로 변한 것이다. 조선전기 인물의 초상화가 극히 드물다는 점에서 여러 번 옮겨 그린 것임에도 그 자료적 가치는 높다. 아울러 효령각 기둥에 걸린 주련은 효령대군의 일생을 잘 요약한 것이다. ‘스스로 왕궁 나와 부처님 계신 곳 왕래하니, 천국을 우러러 연주대에 오르네(出自王宮通佛域, 仰瞻天國上仙臺)’

금륜보전(삼성각) 현판. 근대 서화가 해강(海岡) 김규진(1868~1933)이 썼다. 그는 18세 때 청나라에 유학하여 견식을 넓혔으며 조석진, 안중식과 함께 서화연구회를 창설하고 후진을 양성했다. 그는 큰 글씨를 잘 썼으며, 묵란, 묵죽에 뛰어나 죽란보를 남겼다.

그후 연주암은 지리지나 문집에 관악산을 유람한 기록인 유산기나 시로 등장한다. 조선중기에는 관악산이 유자들의 산중 독서처로 등장한다. 예를 들어 명신 유성룡(1542~1607)은 19세 때인 1560년 겨울, 관악산의 무너진 암자에 들어가 두어 달 동안 맹자 1질을 20여 차례 읽고 암송했다. 유학자들이 학습을 위해 절에 들어가 독서하던 풍습을 보여주고 있다.

한편, 미수 허목은 84세 때인 1678년 영주대에 올랐는데 "영주대는 세조께서 예불하던 곳으로 관악산의 꼭대기에 있다"고 적었다. 이외에도 이응희, 이익, 채제공 등이 유산기를 남기거나 제문을 남겼는데 성호 이익이 쓴 ‘관악산 유람기’는 연주대 가는 길을 가장 상세하게 묘사한 기행문이다.

서울과 경기도를 중심으로 전문적인 소리꾼에 의해 불려진 경기선소리에도 연주대는 등장한다. 경기선소리 중 앞산타령은 "과천 관악산 염불암 연주대요, 도봉 불성 삼막으로 돌아든다"로 시작하는데 경쾌하고 약동적인 소릿조이다. 연주대에 이어 관악산에 있는 불성사와 삼막사를 언급하고 있다. 서울의 명산과 사찰을 알려주고 전국 명산의 진경을 노래했다.

요사채에 걸려있는 ‘산기일석가(山氣日夕佳)’ 현판. ‘산 기운은 석양이 되니 아름답다’는 뜻으로 도연명의 ‘음주’ 시에 나오는 구절이며 머리 인장은 ‘산정일장(山靜日長)’이다. 삼일운동 민족대표 33인의 한 명인 위창 오세창(1864~1953)이 썼다. 그는 독립운동가이자, 서예가이며, 당대 최고의 전각가이자 서화감식가이다. 특히 그가 남긴 ‘근역서화징’, ‘근역인수’는 전근대 한국미술사의 보고이다.

◇정조와 연주대=정조 만큼 조선의 땅의 모습과 민의 삶에 구체적인 관심을 가진 국왕도 드물 것이다. 과천은 남태령, 가자우물, 무동답교놀이 등 정조의 능행과 관련한 많은 고사를 간직한 곳이다. 1789년(정조 13) 국왕 정조(1752~1800)는 생부 사도세자의 묘를 화성으로 옮길 때의 제문 중에는 관악산을 ‘여러 산의 으뜸(冠于衆岳)이니 구슬처럼 아름다운 대가 높이 솟았다’고 언급했다. 관악산은 보통 갓 모양의 산인 ‘갓뫼[冠岳]’로 이해한 것에서 한 발 나아간 이해를 보여준다. 이는 구체적인 조선의 지리에 밝은 정조의 일면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해된다.

정조는 또한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1795 윤2월)을 화성에서 마치고 시흥행궁에서 환궁할 때 이시수에게 연주대는 어디에 있는가를 묻기도 하였다. 1797년 9월 김포 장릉(원종과 인헌왕후의 능)에 행차했을 때 어가가 지나가는 인근 10개 고을의 유생들에게 특별히 과거를 치르기도 하였다. 당시 과천 유생들에게는 "관악산 정상에 올라 북쪽을 바라보며 그 대를 ‘염주(念主)’라 하다.[登冠岳山頂上北望 名其臺曰念主]"라는 시제가 제시됐고 과천에서 거둔 시권은 136장이며, 입격자는 50명이었다.

종무소 밖에 걸린 김정희가 쓴 ‘무량수(无量壽)’ 현판.

◇연주암의 현판=추사체로 일세를 풍미한 추사 김정희(1786~1856) 또한 연주암과 깊은 관련이 있다. 문집에는 연주대에 올라 쓴 시가 남아있고 연주암에는 그가 쓴 ‘무량수(无量壽)’와 ‘채약경석(採葯耕石)’ 현판이 남아있다. 무량수는 한없이 긴 수령이라는 의미이다. 흔히 무(无)자는 사람(大)의 머리 위에 일(一)자가 합쳐진 회의문자로 머리가 보이지 않는다는 의미의 고문이체자(古文異體字)이다. 과천 주암동에 과지초당을 마련하면서 과천을 오고 간 추사는 제주와 북청 등 두 번의 유배가 끝나고 과천 과지초당으로 돌아와 4년간 거주하면서 숱한 명작을 남겼다.

김정희 채약경석 현판 탁본

‘먼산에 먹칠한 듯 휘늘어진 버들가지에/ 지금이 바로 해오라기 좋아하는 연기와 갈매기 좋아하는 비 올때라네/ 돛대 그림자 한들한들 용산 어귀를 감돌아들어/ 서풍에 거침없이 밀물 따라 올라오누나’(김정희, ‘관악산 절정에 올라 읊조려 최아서에게 주다’, ‘완당전집’ 권10) 또한 요사채 툇마루에 걸린 위창 오세창(1864~1953)의 ‘산기일석가(山氣日夕佳)’ 현판 글씨 또한 볼만하다. ‘산 기운은 석양이 되니 아름답다’는 뜻으로 도연명의 ‘음주’ 시에 나오는 구절이며, 머릿도장은 ‘산정일장(山靜日長)’이다.

멀리서 본 관악산

◇1929년 재운(在芸) 스님의 연주암 중창=그럼 연주암이 오늘날의 모습을 하게 된 것은 언제일까? 근대에 와서 연주암은 법당과 판도방(공부방)이 퇴락하고 칠성각은 본래 없었는데 김청산(재운) 스님이 1926년 주지를 맡으면서부터 근대적인 중창불사를 일으켰다. 그는 본래 삼막사의 조성암 화상에게 삭발하고 강원도 건봉사에서 사미과와 사집과를 마치고 연주암 주지로 취임해 그 면모를 일신하게 되었다. 그래서 법당 6칸, 큰방채 10칸, 요사채 10칸, 칠성각 4칸 반, 용화전 1칸 등 40여칸을 신축하였다. 또한 각종 불화도 마련하였는데, 아미타회상도(괘불, 617×318), 금륜보전의 산신도(107×133)와 독성도(107×143)는 근대의 새로운 도상과 기법으로 화승(畵僧) 보경당 보현 스님이 그린 것이다.

청산 스님은 또한 천일염불회를 개설하고, 운고 김일우를 초빙하여 화엄경법회를 열었다. 운고 김일우에 의해 ‘관악산 연주암지’가 발간되기도 하였다. 김일우가 쓴 불교가사 ‘관악산 유산록’은 133행의 장편 가사로 연주암을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문헌의 하나이다.

성아(星兒)라는 필명으로 동아일보(1924.12.8.)에 발표된 임화 최초의 시 ‘연주대’ 전문.

◇임화가 발표한 최초의 시, 연주대=근대를 살다간 시인, 평론가 임화(1908~1953)가 성아(星兒)라는 필명으로 1924년 발표한 최초의 시 제목은 ‘연주대’이다. ‘야주현(夜珠峴) 군밤장사/ 설설히 끓소/ 애오개 만주장사/ 호이야호야/ 이내몸은 과천 관악/ 연주대에서/ 가슴을 파헷치고/ 호이야호야/ 부들밭 오리새끼/ 께우억께웍/ 잔솔밭 까투리는/ 께께푸드덕/ 이내 몸은 관음보살/ 연주대에서/ 손톱을 툭이면서/ 께께푸드덕/’(동아일보, 1924.12.8.)

서울 출신으로 보성중학교 4학년 때 시인이 당시 유행하던 7·5조의 음율로 쓴 시이다. 별을 헤아리며 답답한 식민지의 일상을 연주대에서 가슴을 풀어헤치고 싶었는지 모른다.

해방 후 의왕과 안양에 살았던 소설가 이무영은 관악산을 순례하고 기행문을 남기기도 하였다(관악일순기(冠岳一巡記), 조선일보 1949.11.14.~16.). 연주대에 선 순간 외금강 비로봉에서 내금강의 유곡을 바라보던 착각이 들었다고 한다. 다양한 동물 모양의 기암괴석이 있고 관악을 서금강이니 경기금강이니 부르지만, 자신은 소금강이라 부르고 싶다고 토로한 바 있다.

오르는 길 험한 바위산이 관악이지만 연주암과 연주대는 늘 그렇게 우리 곁에 있었다. 봄이 왔으니 담도 고치고 연주대에 올라 찬바람을 맞으며 한강을 바라보는 여유는 어떨까?

글·사진=허홍범 과천시 추사박물관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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