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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북치등 종중

뿌리를 찾아서

뿌리를 찾아서 (康俊)

 

 

청주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약관 20세 공무원 발령을 받아

 

대구(1970년)로 와서 공기업(통신)에서 33년 열심히 근무하다가

 

민영화가 되면서 명예 퇴직 했다.

 

선배들이 퇴직하여 유흥업 등 창업을 하였으나, 우물 안 개구리

 

마냥 세상을 너무 몰라 실패를 많이 하는걸 보았다.

 

젊었을 때의 실수는 만회 할 기회가 있지만 晩年(만년)에 실수를

 

하면 무덤까지 안고 갈 수 밖에 없다는 부담감 때문에 나를 주춤

 

거리게 했다. 자격증 공부도 열심히 하고, 이것저것 기웃거리다가

 

처의 권유를 받아들여 다가구주택을 구입하여 임대료와 연금으로

 

절약하면서 살고 있다. 노인복지사 자격증을 취득하여 자원 봉사

 

도 하고, 등산도 하고, 취미생활도 하면서 약 3년 보냈다.

 

 

 

1년 남짓 개인회사에 근무(미도정보기술)하게 되었는데, 공직과는 다르게 보수도 적게 받고, 야간 작업과

 

식사도 거르면서, 아들 또래 젊은이들과 일을 하니, 눈도 어둡고 동작도 따라갈 수가 없었으며, 스트레스

 

도 너무 많이 받았다. 몇 달 전 그만 두었지만, 그 후유증인지 혓바닥에 염증과 잇몸 질환으로 치료도 받았

 

고, 耳鳴(이명)도 오고, 이제는 노화로 인한 백내장 수술까지 받게 되었다. 벌써 흰 머리도 많아지고,

 

볼품 없이 주름살도 늘었다. 하지만 아직도 일 할 능력도 있고, 세상을 바꿀 경륜이 있음을 자랑하지만

 

세상이나 경제가 너무 어려워져서 마음처럼 호락호락 하지를 않다.

 

 

 

그래서 지금은 도서관에 가서 내 좋아하는 분야에 공부도 하고, 책도 보고, 등산도 하면서 좋아하던 술도

 

적게 마시고 담배도 끊었다. 마음을 비워야지. 인생 칠 팔십 얼마나 더 살겠다고…… 욕심을 버리고 지금

 

까지 살아온 것에 감사하고, 더는 명예를 탐내고 더는 돈에 집착하지 말아야지, 하는 맘이 앞서게 된다.

 

세상을 편안하게 바라보고, 나 보다 못한 사람들 생각하며, 安分知足(안분지족)과 安貧樂道(안빈낙도)로

 

 살아야 한다고 굳게 다짐한다. 

 

 

 

그 중에 두 달 전 손자가 태어나 얼마나 귀여운지 일 주일에 한번 정도 보지만 자꾸만 보고 싶어 진다.

 

티 없는 새까만 눈동자와 때묻지 않은 순수함 그 자체를 보는 것이 요즘 나의 유일한 즐거움이다.

 

아들 둘 키울 때는 직장에 올 인하여 잘 보아주지를 못했었다.

 

 

 

작년 10월 밤 자정이 다 되어가는 칠흑 같이 새까맣고 조용한 밤에 적막을 깨뜨리는 한 통의 전화 벨

 

소리가 울렸다.자못 일 주일이상 아무것도 안 드시고 곡기를 끊으신 고향 청주 형님을 걱정하던 때

 

이므로 불안한 마음으로 수화기를 들었다. 예상은 적중했다. 조카였다.

 

"작은 아버지, 아버지가 지금 위독해서 힘듭니다." "그래, 알았다"

 

몇 분이 지났을까? 수원 형님의 전화가 연이어 이어졌다.

 

"형님 돌아가셨다""예, 알았어요" 그것으로 형님은 유명을 달리 한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1주일 전 장인어른이 돌아가셔서 장례식과 삼우제를 막 끝난 후였다. 청주에 가서 형님을

 

 한번 더 얼굴을 뵈려 했는데…..

 

 

 

" 장례식장에 갔으나 형님은 평생 조상들 제사를 40여 년 지냈는데, 조카가 교회 식으로 장례식을 한다니

 

어쩔 수가 없었다. 1주일 전 영세를 받았다나? 후후.. 형님은 말씀도 못하고 누워만 있었는데……

 

장례식을 하고 봉분을 만든 후, 상돌 위에 나 혼자 소주 한잔 붓고 절 두 번 하고는 울면서 도망치다시피

 

대구로 내려왔다.

 

 

 

그 후로는 형님 집에서 제사를 안 지내는 터라 명절에도 고향도 못 가고, 형님 집에 가서 형제들도 못

 

만나고, 외롭고 쓸쓸하게 보낸다. 천만 이상 국민이 이동을 한다는 뉴스를 보면 "우리 가족은 왜 이래야만

 

할까" 하며 허탈 해 하기도 한다. 할 수 없이 우리 식구들은 부모님 기일에는 고향인 청주의 산소에 가서

 

제사를 지내고 쓸쓸히 돌아온다. 마침 제사가 추석, 설 때라서 다행이다.

 

 

 

伯氏(백씨)는 청주에서 7남매의 맏이로 일제 강점기인 1937년 태어나셨다. 초등학교를 간신히 졸업하고,

 

 인쇄소에 취직하여 야간 중학교를 고학으로 졸업하셨다. 그게 학력의 전부이면서도 漢字(한자)를 많이

 

아시는 것은 물론 다방면으로 실력이 대단하셨다. 인쇄소 다닐 때는 충북출판노조 지부장도 했고,

 

인쇄소를 운영할 때에는, 충북출판사 대표 이사장도 했는데 여러 분야에 博識(박식)하시고 훌륭한

 

분이셨다. 부모님이 60세 안 밖에 일찍 돌아가셔서 가정형편이 아주 힘들었는데도 맏이로서 동생들

 

공부며 결혼까지 모두 형님의 몫으로 충분히 해내셨다.

 

 

 

누나 세분은  6.25 전쟁 바람에 초등학교도 다 졸업하지 못하셨지만  작은 형과 나는 형님께서 공부를

 

시켜 주셨다. 보답이라도 하듯 우리는 열심히 공부해서 둘 다 장학생으로 거의 수업료 면제 받고 힘들게

 

고등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다. 물론 부업으로 일도 많이 했다. 인쇄소에서 화물에 사용하는 꼬리표도

 

만들고, 토끼도 50마리 이상 기르고, 신문배달, 아이스 케이크 장사, 벽돌운반, 연탄배달, 구두도 닦고

 

별걸 다 했다. 아버지께서는 기와 일을 하시는 기술자로 전국을 다니셨으나, 식생활 자체가 힘들었다.

 

 

 

한번은 식구들 먹을 것이 없어서 형님이 아버지를 찾아 청주에서 강원도 영월까지 400여 리를 16살 때

 

걸어서도 가고, 트럭에도 올라 타다가 맞기도 하면서, 아버지를 만났지만 돈도 못 얻어 왔던 적도 있다

 

하셨다. 누구나 다 고생한 시절이지만, 우리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버지는 청부업을 하면서도 인정이

 

많으셔서 일꾼들 참으로 술과 밥 사주고 결산하면  늘 적자 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돈 받는 날만 되면

 

빚쟁이들이 우리 집에 오곤 했었으니 말이다.

 

어머니는 밭에 나가 일도 하고, 과일도, 조개도 파셨다. 복숭아도 팔았는데 어머니는 저만치 서있고

 

나 보고 팔라 하셨다. 자존심이 강하셨다. 우리는 두부 비지, 술 찌꺼기, 배추 씨라기(일명 짠지 밥), 구호

 

물자인 강냉이 우유 등으로 연명했다. 어머니는 창녕 성씨였는데, 성 삼문 후예랄까 자존심이 너무강해서

 

식량을 남에게 꾸러 갈 생각을 안 하셨다. 그냥 굶기는 것이다. 나도 최고 사흘 연속 굶은 적이 있는데

 

하늘이 노랬던 것으로 기억한다. 큰형님이 군대서 휴가나오셔서 어머니와 같이 와서 학교앞에서 풀빵을

 

사주신것이 기억난다. 그래서 나는 끼니를 절대 거르지 않는다. 배고파 보지 않아 본 사람은 절대 모른다.

 

지금도 두부비지, 죽, 보리 등은 꼴도 보기도 싫다.

 

 

 

부모님 살아 계실 때, 어머니 말씀이 "조부께서 전북 장수에 사실 때 왜놈순사를 죽였는지 늘 쫓기어 다니며

 

살다가, 증조부님이 돌아가셔서 장례만 마치고 야밤 도주를 했다고 한다"  "증 조모님은 전주 이씨 세계1부

 

가승 만 주면서 절대 고향에 돌아오지 말라고 하셨다" 한다.

 

그 후 조부님은 천안으로, 충북 진천, 청주 등을 전전 하다가 청주에서 터를 닦고 한의원을 하셨다 한다.

 

부모님은 학력도 짧고 漢字(한자)도 모르셔서 광복 후 6.25 등 激動(격동)속에 힘든 세상을 살다가 뿌리

 

 찾을 생각도 못하고, 1970년대 돌아가시게 되었다.

 

 

 

형님은 18세에군에 입대, 제대 후 1959년 부모님 권유로 가승만 가지고 조상들의 산소가 많은 전북의 남원

 

임실 장수군을 찾았으나 실패 하였고, 청주에 전주 이씨 종친회에 참여하여 효령대군 파와 족보를 복사하여

 

가승과 일치 여부 등 여러모로 검토했으나 중단했다.

 

 

 

그러던 중 50세 되던 해 형님이 혈관계 이상으로 수술을 받고 쉬던 중에, 1990년부터 본격적으로 조상

 

뿌리를 찾기를 시작하였다. 청주호적등본과 말소된 제적부로 역으로 추적했다. 충북 진천군 충남 천안

 

군을 시작으로 전북 장수군 계남 면을 추적하다가 면사무소에서 증조부 성함을 찾았고, 동네에 사시는

 

92세 되신 할머니가 조부님을 잘 안다고 하면서, 이 생원 손자라고 반가워 하셨다 한다. 그러면서 증조

 

부님을 학교 뒷산 너머에  장사 지냈다는 이야기를 듣고 양쪽 골짜기 60여 곳의 비석 및 표석을 찾았으나

 

결국은 찾지 못하고 유실된 상태가 되었다. 마지막으로 가승과 제적부 등을 모두 정리하여, 서울 서초구

 

방배동 소재 효령대군 사당이 있는 淸權祠(청권사)를 찾아가서 이사님을 만나 의뢰하던 중 전북 남원에

 

"北峙嶝(북치등)파가 틀림없다"하여 회장님이 소장한 것과 우리 가승과 필체가 똑 같아 인정받게 되었

 

으며 고조부 성함 李 福原(이 복원)과  산소까지 찾았다.

 

 

 

뿌리를 찾는다고 형님이 찾아 나선지 40여 년 만에 조부께서 떠나신 후 부모님이 평생 염원하신 숙원

 

을 130년 만에 한을 풀어 고향을 찾았다. 얼마나 형님이 뛸 듯이 기뻐하며 좋아하시던 모습을 뵙고 우리

 

동생들도 얼마나  같이 좋아했는지 모른다. 그 이야기를 형님과 나는 밤을 새워 가며 많은 이야기를 했다.

 

宗 中(종 중)에서는 고조부 네 형제 분 중 막내 고조부 자손들을 찾았다며  일가 친척 분들이 크게 반기고

 

환영해 주셨다. 우리는 처음으로 친척 중 제일 가까운 10촌 친척을 찾은 것이다.

 

 

 

1992년부터 현재까지 10여 년간 時祭(시제)에 참석함은 물론, 청주에 부모님 산소는 형과 조카들이 관리

 

하고 남원에 고조부산소(1999년 남원 이전)는 내가 대구에서 남원까지 가서 추석 전 벌초하고 성묘하고

 

있으며, 년 초엔 정기총회도 참석한다. 서울 방배동에 있는 효령대군 산소도 참배 했으며, 포천에 효령

 

군의 아들과 손자 서원군과 고림군 산소도 참배하였고, 조선 연산군 때 갑자사화에 연루, 피신하여

 

전북 임실 남원에 터를닦은 춘성정 공 산소(전북 임실)도 참배하였다.

 

 

 

매년 4월 둘째 주 일요일에는 고조부 4분 자손들이 모여 5대조 한 아버님과 고조부 네 분의 제사를

 

 같이 모신다.나는 효령대군의 18대손 강자 항렬로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 산다. 대구에서 고령 합천

 

 거창 함양 지리산 남원까지 88고속도로를 누비며, 봄에 핀 개나리, 벚꽃, 진달래 등 이름 모를 꽃들이

 

 만개한 것을 보고 기분을 만끽하면서, 우리 가족은 남원으로 간다. 지친 일상적인 삶에서 벗어나 조상

 

들이 만들어 준 보너스에 감사하면서 나에 SANTAFE 애마에 아들 둘과 며느리 아니 이젠 손자 놈 廷顔

 

(정안)이 까지남원엘 기분 좋게 가서영호남에 교류도 확대하고 일가 친척들을 만난다. 역시 추석 전

 

우린 또 한차례 고조부 산소 벌초 겸 성묘차 제초기 낫을 준비 해서 또 가족 여행을 떠난다. 며느리도

 

낫을 들고 같이 땀 흘리며 일 하는걸 보면 얼마나 귀여운지, 우리 손자도 나의 품에 안겨 주었는데…..

 

 

 

이 모든 것을 큰 형님과 내가 주관해서 열심히 잘 하고 있던 중 25년 만에 孝寧大君 二子 瑞原君 파

 

족보를 만든다는 기쁜 소식이 전해졌다. 그래서 증조부, 조부, 부모님을 비롯한 형제들 이름을 남원

 

康善(강선)형님과 전주 종친회를 거쳐 서울 본사 淸權祠(청권사)에 모두 제출 한 상태이고 내년 3월

 

이면 족보 책이 나온다 하여 기다리고 있다. 형님이 모든 것을 다 바쳐 평생 숙원사업으로 다 해 놓고,

 

10년 전 폐암으로 수술한 후유증으로 뇌로 전이 되어 방사선 치료를 받았는데, 재생을 모두 염원

 

했으나 끝내 족보 책이 나온 그 기쁨을 만끽하지 못하시고, 세상을 하직하실 줄이야~ 너무 안타깝고

 

또한 너무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형님은  "내가 죽어서 부모님 만나면 부모님의 한 생전

 

염원 풀고 왔습니다." 라고 하면 "부모님이 매우 좋아할 것"이라며 씩 미소 지으셨습니다.

 

그리고 "형제들과 잘 살다 부끄럼 없이 잘 살다 부모님 곁으로 왔다고 말씀 드리겠다"며 이야기도

 

 했습니다.

 

 

 

작년 서울과 청주병원 입원 중에 찾아 뵙고 돌아가시기 전 집에 계실 때까지 병문안을 가면 날

 

보고 반갑게  맞으면서 "백만장자가 안 부럽다. 너만 보면……" 하시면서 좋아하시다가 돌아가시기

 

며칠 전 뼈만 앙상히 남고 눈을 감으신 채로 "널 얼마나 보고 싶었다고……"이 말 만 연속 세 번

 

하시곤 그게 마지막이었다. 정말 형님과는 서로 너무 좋아하면서 우애를 나누었는데……요즘 같은

 

세태에 보면 젊은 사람들은 조상, 제사, 족보, 산소 등 관심도 없고 하려고 하지도 않는 이 때, 우리

 

자랑스러운 형님은 평생 숙원인 조상의 뿌리와 고향을 우리 형제들과 자손들에게 족보와 가계

 

계통을 물려 주시고 가셨다. 종 중에서도 일부 사람들은  먹고 살기도 힘든데 묘사, 시사는 무엇

 

이며  "쓸데없이 죽은 조상에게 배부른 짓 한다" 하면서 "자식들 공부시키게  돈이나 주지, 산사람이

 

 최고다" 라며 이상한 소릴 지껄이지만, 조상이 없고 어떻게 우리가 있을수 있으며 자손들 후손들이

 

있겠는가? 웃기고 참으로 한심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의 중시조 孝寧大君(효령대군)은 朝鮮(조선)을 開國(개국)한 조부님이신 太祖大王(태조대왕), 부친

 

太宗大王(태종대왕)과 世宗大王(세종대왕)동생에게 왕위를 물려 주시고, 불교에 심취하여 크나 큰 업적을

 

 많이 남겼으며 왕실어른으로서  조선 9대왕 성종까지 종친으로서의 임무를 다하시고 91세로 장수 하셨다.

 

 

 

그리고 전북에 "둔덕고을 脈과 香氣(맥과 향기)" 라는 책을 보면 알 수 있듯이 春城正(춘성정)公과 承旨公

 

(승지공)이 계시고  壬辰倭亂(임진왜란)때는 李 大胤(이 대윤), 李 曄(이 엽)님이, 天默齋 尙馨(천묵제 상형)

 

님은 丁卯(정묘), 丙子胡亂(병자호란)때 義兵(의병)을 일으키고 軍需物資(군수물자)를 지원하는 등 愛國

 

(애국)하는 祖上(조상)님들의 모습이 눈에 보이듯이 훤하다. 전북 대학교에서도 기념 활동도 같이 하고,

 

 책도 소장하고 있다고 하니 가히 짐작할 만한 일이다. 나는 직계 조상들로부터 나까지 족자라도 만들어

 

훌륭한 조상들의 업적을 기리고 뿌리에 소중함을 일깨워 주고 싶다. 누가 뭐래도 말이다. 나의 아들 과

 

손자까지 잘 전해 줄 것이다.

 

 

 

그리고 이 족보가 나오면 형님의 공덕의 시를 짓고 책 1부를 예쁜 보자기에 청실 홍실 묶어서, 산소 앞에

 

고이 묻어 드릴 것이다. 그리고 음식 차려 진배하고, 술 한 잔 부어 드리면서 많은 대화를 하고 형님의 공을

 

 치하드릴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면 가슴이 뿌듯하면서 한편 가슴이 저려온다. 부디 하늘 나라에 먼저 가신

 

부모님과 누나 동생 모두 만나서 행복하게 사시겠죠?

 

 

 

"형님! 저도 좋은 일 많이 하고 남을 위해 돕고 베풀며 살다가  형님께 돌아가겠습니다." 그때 만나서 "이승

 

에서 못다한 정 나눕시다." "이제 三 男妹(삼 남매)만 남았는데 종교싸움 그만하고 잘 지내도록 간곡하게

 

부탁 드리겠습니다." 라고 형님께 말해야겠다.

 

 

 

족보에 오르도록 후원해주신 北峙嶝(북치등) 宗中(종중) 李 康善(이 강선)회장님, 李 康厚(이 강후)총무님,

 

청권사 李 康玩(이 강완)이사님께 깊은 감사드립니다.

 

 

 

 

                                                                 ▲ 고조부 고조모 이복원 산소(임실)

 

 

 

증조부 이의상(전북 장수군 계남면) 실전

 

                                                

 

 

                                                                        ▲  할아버지 할머니 산소

 

 

 

 

 

 

                                                                         ▲ 아버지 어머니 산소

    

 

 

 

 

 

 

 

 

                                                             ▲ 형님(이덕전)산소에 2009년 대상 제사지내고

 

                                                      족보 읽어드리고 형님의 노고를 위로드렸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