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7세 석만(錫萬)
配 南原楊氏 운교리 뒤동산 合葬
晩石居士 全州李公 墓表
위치 : 전북 임실군 오수면 용두리 산 50
晩石居士全州李公 之墓 (만석거사전주이공지묘)
配孺人南原楊氏 祔合兆 (배유인남원양씨 부합조)
晩石居士 全州李公 墓表
湖南名山 南原 天皇峯 流脈이 南西來而有 雲橋村 左 丁坐原 四尺之封은 나의 五代祖考妣의 萬年幽宅이다.
(호남명산 남원 천황봉 유맥이 남서래이유 운교촌 좌 정자원 사척지봉은 나의 5대조고비의 만년유택이다.)
호남의 명산 남원 천황봉 유맥이 남서향으로 흘러 있는 운교리 좌측 동산 정좌 자리에 있는 4자짜리 봉분은 나의 5대조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묘이다.
公의 諱는 錫萬이오. 字 士永이며 晩石은 其號라.
(공의 휘는 석만이오. 자는 사영이며 만석은 기호라.)
공의 이름은 석만이고 본 이름 외에 부르는 이름인 자는 사영이며 또 다른 이름인 호는 만석이다.
系出우리(은?) 太宗恭定大王의 第二子이신 孝寧大君 諱 補 靖孝公으로 爲派祖하고 系而 嘉德大夫 瑞原君 諱는 𡩁이오. 諡號는 夷安이며 高林君 諱는 薰이며 漆山君 諱는 璿孫이며 四世는 宗室의 至親이오.
(계출은 태종공정대왕의 제2자이신 효령대군 휘 보 정효공으로 위파조하고 계이 가덕대부 서원군 휘는 친이오. 시호는 이안이며 고림군 휘는 훈이며 칠산군 휘는 선손이며 4세는 종실의 지친이오.)
석만 조부님의 선대 계보는 조선 태종대왕의 둘째 아들이신 효령대군을 파시조로 하여 2세 서원군 3세 고림군 4세 칠산군으로 이어지며 4세까지는 종실과 더없이 친함이 형제와 같다.
漆山君의 第三子 諱 渾은 贈 承政院 左承旨로 季父 春城正 諱 聃孫의 后가 되고 春城正께서 燕山甲子에 朱溪君三父子 被禍를 보고 南原 屯德坊에 隱遯하시니 子孫이 仍居焉이라.
(칠산군의 제3자 휘 혼은 증 승정원 좌승지로 계부 춘성정 휘 담손의 후가 되고 춘성정께서 연산갑자에 주계군3부자 피화를 보고 남원 둔덕방에 은둔하시니 자손이 잉거언이라.)
칠산군의 셋째아들 혼은 승정원 좌승지로 증직된 분으로 자손이 없는 춘성정의 뒤를 잇게 되고, 춘성정께서는 연산군 10년 임사홍이 일으킨 갑자사화로 모함을 받아 피살된 효령대군의 증손 주계군(보성군 손자-평성군 자)과 두 아들의 피살을 보고 세상을 피하여 남원 둔덕방에 숨으니 그 자손도 대를 이어 터를 잡고 살았다.
春城正의 孫 慶胤은 忠義衛 禦侮將軍이오. 曾孫은 昱이니 忠義衛며 兩世가 孝行으로 南原誌에 薦錄되고
(춘성정의 손 경윤은 충의위 어모장군이오. 증손은 욱이니 충의위며 양세가 효행으로 남원지에 천록되고)
춘성정의 손자 경윤은 충의위 어모장군이요. 증손자는 충의위 욱이며 둘다 대를 이어 효행을 하여 남원지에 천거되어 기록으로 남아있다.
玄孫 諱 尙馨은 沙溪 金文元先生의 秀第(弟?)子로 仁廟에 登第하여 弘文館 校理와 世子 侍講院 輔德 司憲府 持平 司諫院 正言과 弘文館 副修撰으로 入直 玉堂時에 胡騎가 猝迫都城하니 扈駕 南漢山城하여 督戰御事와 斥和臣으로 竪功하니 後에 三學士例로 贈資憲大夫 吏曹判書 兩館(官?) 大提學과 賜諡 忠景公하니 世稱 天默齋 先生은 公의 六大祖이며
(현손 휘 상형은 사계 김문원 선생의 수제자로 인묘에 등제하여 홍문관 교리와 세자 시강원 보덕 사헌부 지평 사간원 정언 홍문관 부수찬으로 입직 옥당시에 호기가 졸박도성하니 호가 남한산성하여 독전어사와 척화신으로 수공하니 후에 삼학사 예로 증 자헌대부 이조판서 양관 대제학과 사시 충경공하니 세칭 천묵재 선생은 공의 6대조이며)
춘성정의 고손자 상형 천묵재는 사계 김장생의 수제자로 인조때 벼슬길에 나가 홍문관 부수찬(종6품) 사간원 사헌부 홍문관 교리(정5품)와 세자 시강원 보덕을 역임하셨으며, 병자호란 때 오랑캐의 말발굽이 도성을 짓밟을 때 임금의 수레를 호위하여 남한산성으로 피난시킨 후 독전어사와 척화신으로 공을 세워 후에 삼학사(홍익한 윤집 오달제)와 같이 자헌대부 이조판서, 대제학(정2품)으로 증직됨과 함께 충경공의 시호를 받으신 분으로 석만 공의 6대조이시다.
高祖 諱는 聖淵이니 忠義衛요. 曾祖 諱는 頤孝 祖 諱는 煡 考 諱는 應華요 妣는 文化柳氏 震和女이며 祖는 春新 曾祖는 再慶 外祖는 長水 黃錫中이다.
(고조 휘는 성연이니 충의위요. 증조 휘는 이효 조 휘는 흔 고 휘는 응화요. 비는 문화유씨이며 조는 춘신 증조는 재경 외조는 장수 황석중이다.)
고조부는 충의위 성연이요. 증조부는 이효, 조부는 흔, 부는 응화, 모는 문화유씨 진화의 딸이며 춘신의 손녀이고 재경의 증손녀이며, 장수 황씨 석중의 외손녀이다.
公은 正祖 丙午(1986) 11月 25日生 而 聰明睿智가 超人하여 聞一知拾의 天出之才였으나 先代의 義意에 따라 學而不擧하며 孝友睦隣하며 順承家訓하여 坊里의 模範隱士로 獻身하며 娶 南原 楊宗烈女하니 祖는 廷漢 曾祖는 參判 大根 外祖는 通德郞 全州 李完鎭이며 辛丑生이라.
(공은 정조 병오(1786) 11월 25일생 이 총명예지가 초인하여 문일지습의 천출지재였으나 의의에 따라 학이불거하여 효우목린하며 순승가훈하여 방리의 모범은사로 헌신하여 취 남원양종렬여하니 조는 정한 증조는 참판 대근 외조부는 통덕랑 전주이씨 완진이며 신축생이라.)
석만 공은 1786년11월25일생으로 보고 들은 것을 오래 기억함은 물론 지혜의 깊이가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뛰어나셔서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아는 천명 중에 하나 나올 정도의 재주를 지녔으나, 선대의 뜻에 따라 학문의 길로 가지 않고 부모님께 효도와 형제간에 우애하고 이웃과 친목하는 집안의 가풍을 따라 벼슬을 하지 않고 시골에서 은둔 헌신하는 삶을 살면서 1781년생인 남원양씨 종렬의 딸이며, 정한의 손녀, 참판 대근의 증손녀, 통덕랑 전주이공 완진의 외손녀에게 장가를 들었다.
婦德을 兼備하야 育 四男二女하니 男曰 民源 長源 會俊 福源과 女曰 順興 安昌烈과 慶州 金致禧 妻者하고 乙未6月16日 卒하니 葬于 東溪面 內靈理 先山下 丙坐原하고 配는 戊子 2月 12日 卒하니 葬于 雲橋村 左北峙嶝에 安葬하였는데 一白三十有餘年後 丙寅年 公의 遷葬時 配位와 合封하였고
(부덕을 겸비하야 육4남2녀하니 남왈 민원 장원 회준 복원과 녀왈 순흥 안창렬과 경주 이치희 처자하고 을미 6월16일 졸하니 장우 동계면 내령리 선산하 병좌원하고, 배는 무자 2월12일 졸하니 장우 운교촌 좌 북치등에 안장하였는데 130유여년후 병인년 공의 천장시 배위와 합봉하였고,)
공의 처 문화류씨는 부인의 도리와 덕을 갖춰 민원 장원 회준 복원 4남과 2녀를 두어 순흥안씨와 경주이씨에게 시집을 보냈고,
석만 공께서 1835년 6월 16일 돌아가셔서 동계면 내령리 선산 병좌에 묘를 만들었고,
할머님께서는 1828년 2월 12일 돌아가셔서 운교리 좌측 북치등에 안장하였다가 130여년이 지난 2006년 할아버지 묘를 옮길 때 합장하였다.
長房 民源은 娶 高靈 申英錄女하여 育 相直 相貞 相愚하고 再娶 順興安思重女하여 育 相浩 淇宇하고
二房 長源은 娶 和順崔基榮女하여 育 郁宇와 宜寧 南秉圭와 慶州 金敎와 順興 安鐘潤 妻者하고
三房 會俊은 娶 順興安相吉女하여 育 𤤯宇와 慶州 李奎永 妻者하고
季防 福源은 娶 光山 金基井女하여 有相儀였으나 季房의 夭折로 家勢 困窮함에出家不還으로 長房 三男 相愚로 代喪하고 舊碑에 詳細히 記錄되었으나 只今은 想考할길 全無하다.
(장방 민원은 취 고령신영록여하여 육 상직 상정 상우하고 재취 순흥안사중여하여 육 상호 기우하고, 2방 장원은 취 화순 최기영여하여 육 욱우와 의령남병규와 경주김치와 순흥안종윤 처자하고, 3방 회준은 순흥안상길여하여 영우와 경주이규영 처자하고, 계방 복원은 취 광산김기정여하여 유상의였으나 계방의 요절로 가세곤궁함에 출가불환으로 장방 3남 상우로 대상하고 구비에 상세히 기록되었으나 지금은 상고할길 전무하다.)
장남 민원은 고령신씨 영록의 딸을 맞아 상직 상정 상우 3남을 낳아 기르다 34살에 돌아가신 후 순흥 안씨 사중의 딸을 취하여 상호와 기우를 낳아 함께 길렀다.
차남 장원은 화순 최씨 기영의 딸을 맞아 육우와 3녀를 의령남씨 병규 경주김씨 치 순흥안씨 종윤에게 출가시켰다. 3남 회준은 순흥안씨 상길의 딸을 맞아 영우와 딸을 경주이씨 규영에게 출가시켰다. 막내 복원은 광산김씨 기정의 딸을 맞아 상의를 낳았으나 21살에 요절하고 가세가 곤궁함에 따라 남은 가족들이 가출하여 돌아오지 않아 민원의 3자 상우에게 상을 맡아 대를 이어가도록 옛날 비에 상세히 기록되었으나 없어져 확인할 길이 없다.
埋石 二十有餘年 丙戌冬 宗會에서 竪碑治墳을 決意하고 宗命으로 康善에게 成文케 함에 別無添言이나 家狀을 基礎하고 傳言을 詳考하여 事實을 記錄할 뿐이며 曾玄以下는 繁不盡錄이나 後孫의 繁盛이 두분의 陰德이리니 團合과 崇祖敦宗을 宗是로 永久長保를 祈願하노라.
(매석 20유여년 병술동종회에서 수비치분을 결의하고 종명으로 강선에게 성문케함에 별무첨언이나 가상을 기초하고 전언을 상고하여 사실을 기록할 뿐이며 증현이하는 번불진록이나 후손의 번성이 두분의 음덕이리니 단합과 숭조돈종을 종시로 영구장보를 기원하노라.)
공의 묘지 앞에 돌을 놓은지 20여년이 지나 2006년 병술년 겨울 종회에서 비석을 세우고 봉분을 만들 것을 결의하고, 강선에게 비문을 짓도록 함에 별도로 첨부할 말이 없어 그동안의 종중 운영 사항과 전해 내려오는 말씀을 자세히 살펴서 사실대로 기록하고, 증손자들까지 번성함을 전부 기록하지 못함은 아쉬우나 후손들의 번성이 두분의 숨은 덕행으로 생각하고 종원 모두는 오랫동안 화목하게 조상을 잘 모시면서 살기를 기원하노라.
2007년 丁亥 二月 北峙嶝宗中 謹竪
2007년 정해년 2월 북치등종중에서 삼가 세우다.
(비석 원문)
晩石居士全州李公 之墓
配孺人南原楊氏 祔合兆
晩石居士 全州李公 墓表
湖南名山 南原 天皇峯 流脈이 南西來而有 雲橋村 左 丁坐原 四尺之封은 나의 五代祖考妣의 萬年幽宅이다.
公의 諱는 錫萬이오. 字士永이며 晩石은 其號라.
系出우리(은?) 太宗恭定大王의 第二子이신 孝寧大君 諱 補 靖孝公으로 爲派祖하고 系而 嘉德大夫 瑞原君 諱는 𡩁이오. 諡號는 夷安이며 高林君 諱는 薰이며 漆山君 諱는 璿孫이며 四世는 宗室의 至親이오.
漆山君의 第三子 諱 渾은 贈 承政院 左承旨로 季父 春城正 諱 聃孫의 后가 되고 春城正께서 燕山甲子에 朱溪君三父子 被禍를 보고 南原 屯德坊에 隱遯하시니 子孫이 仍居焉이라.
春城正의 孫 慶胤은 忠義衛 禦侮將軍이오. 曾孫은 昱이니 忠義衛며 兩世가 孝行으로 南原誌에 薦錄되고
玄孫 諱 尙馨은 沙溪 金文元先生의 秀第(弟?)子로 仁廟에 登第하여 弘文館 校理와 世子 侍講院 輔德 司憲府 持平 司諫院 正言과 弘文館 副修撰으로 入直 玉堂時에 胡騎가 猝迫都城하니 扈駕 南漢山城하여 督戰御事와 斥和臣으로 竪功하니 後에 三學士例로 贈資憲大夫 吏曹判書 兩館(官?) 大提學(정2품)과 賜諡 忠景公하니 世稱 天默齋 先生은 公의 六大祖이며
高祖 諱는 聖淵이니 忠義衛요. 曾祖 諱는 頤孝 祖 諱는 煡 考 諱는 應華요 妣는 文化柳氏 震和女이며 祖는 春新 曾祖는 再慶 外祖는 長水 黃錫中이다.
公은 正祖 丙午(1986) 11月 25日生 而 聰明睿智가 超人하여 聞一知拾의 天出之才였으나 先代의 義意에 따라 學而不擧하며 孝友睦隣하며 順承家訓하여 坊里의 模範隱士로 獻身하며 娶 南原 楊宗烈女하니 祖는 廷漢 曾祖는 參判 大根 外祖는 通德郞 全州 李完鎭이며 辛丑生이라.
婦德을 兼備하야 育 四男二女하니 男曰 民源 長源 會俊 福源과 女曰 順興 安昌烈과 慶州 金致禧 妻者하고 乙未6月16日 卒하니 葬于 東溪面 內靈理 先山下 丙坐原하고
配는 戊子 2月 12日 卒하니 葬于 雲橋村 左北峙嶝에 安葬하였는데 一白三十有餘年後 丙寅年 公의 遷葬時 配位와 合封하였고
長房 民源은 娶 高靈 申英錄女하여 育 相直 相貞 相愚하고 再娶 順興安思重女하여 育 相浩 淇宇하고
二房 長源은 娶 和順崔基榮女하여 育 郁宇와 宜寧 南秉圭와 慶州 金敎와 順興 安鐘潤 妻者하고
三房 會俊은 娶 順興安相吉女하여 育 𤤯宇와 慶州 李奎永 妻者하고
季防 福源은 娶 光山 金基井女하여 有相儀였으나 季房의 夭折로 家勢 困窮함에出家不還으로 長房 三男 相愚로 代喪하고 舊碑에 詳細히 記錄되었으나 只今은 想考할길 全無하다.
埋石 二十有餘年 丙戌冬 宗會에서 竪碑治墳을 決意하고 宗命으로 康善에게 成文케 함에 別無添言이나 家狀을 基礎하고 傳言을 詳考하여 事實을 記錄할 뿐이며 曾玄以下는 繁不盡錄이나 後孫의 繁盛이 두분의 陰德이리니 團合과 崇祖敦宗을 宗是로 永久長保를 祈願하노라.
2007년 丁亥 二月 北峙嶝宗中 謹竪
'뿌리 > 북치등 종중'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39세 상이(相伊) (0) | 2013.10.23 |
---|---|
제38세 高祖父 복원(李福源) (0) | 2013.10.23 |
[스크랩] 제36세 응화(應華) (0) | 2013.10.23 |
[스크랩] 제35세 흔(火+建) (0) | 2013.10.23 |
[스크랩] 제34세 이효(頥孝) (0) | 2013.10.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