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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세 목조대왕(穆祖大王)
17세 양무(陽茂) 공의 아들로 이름은 안사(安社)요, 고려때에 벼슬하여 의주지사(宜州知事)를 지내고 원(元)나라로 들어가 벼슬하여 남경(南京) 오천호(五千戶)의 다루카치(達魯花赤 : 원나라 지방 관청의 장관직)가 되었다가 1274년(고려 원종 15) 3월 10일에 승하하였다. 1394년(태조 3) 11월 6일에 목왕(穆王)으로 추존되고, 그 뒤 태종대왕이 인문성목(仁文聖穆)이라고 존호를 더 올렸다. 1899년(광무 3) 11월 27일에 강원도 삼척시 미로면 활기리 옛 살던 집터에 고종황제가 친히 쓴 `목조대왕 구거유지(穆祖大王 舊居遺址)' 8자의 비를 세웠고, 1900년(광무 4) 1월 18일에는 전주 자만동(滋滿洞)에도 비와 비각을 세우고, 고종황제가 친히 `목조대왕 구거유지'라고 8자를 썼다.
능은 덕릉(德陵)으로 함흥(咸興) 서북쪽 가평사(加平社 : 現 咸南 新興郡 加平面 陵里)의 계좌(癸坐)에 있다. 그러나 처음에는 함북 경흥(慶興 : 孔州)의 성남(城南)에 있었는데, 1410년(태종 10)에 이 곳으로 이장하고 표석(表石)을 세웠다.
배위는 효공왕후(孝恭王后) 이씨(李氏)이다. 본관은 평창(平昌)이요, 천우위장사(千牛衛長史) 공숙(公肅)의 딸이며 5월 15일에 승하하였다. 1394년(태조 3) 11월 6일에 효비(孝妃)로 추존되고, 그 뒤 태종대왕이 효공(孝恭)이라고 존호를 더 올렸다.
능은 안릉(安陵)으로 목조대왕과 같은 언덕인데, 처음에는 경흥 성남 땅에 있다가 1410년(태종 10)에 이리로 이장하고 표석을 세웠다.
아들 6남을 두었다.
사자(嗣子)는 익조대왕이고, 차례는 넷째요,장남은 안천대군(安川大君) 어선(於仙)이요, 차남은 안원대군(安原大君) 진(珍)이며, 3남은 안풍대군(安豊大君) 정(精)이요, 5남은 안창대군 (安昌大君) 매불(梅拂)이요, 6남은 안흥대군(安興大君) 구수(球壽)이다.
<완산실록> <동국세기> <충효전>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하는데, 부분적으로 자구(字句)가 틀릴 정도이다.
`목조대왕께서는 어려서부터 천성이 순후하신데, 하루는 꿈에 청의동자가 나타나 말하기를 “공의 선대에 하느님께서 주신 물건이 있으니 잘 간직하시오. 후일에 반드시 좋은 일이 있을 것이오.”라고 하셨다. 그래서 꿈을 깨어 찾아보니 구슬도 아니고 돌도 아닌 술잔 같은 것이 있었다. 이에 더욱 소중히 생각하고, 어느 날 대랑산(大郞山 : <동국세기>에는 天狼山, <충효전>에는 大落山)으로 사냥을 갔다가 돌아오시는데 한 노파가 집 근처에서 기다리다가 대왕께 물었다. 선대부터 내려오는 보물을 잘 간직하고 있느냐는 것이었다. 이에 어떻게 그것을 아느냐 하니 그 노파가 말하기를 “향린산(香麟山 : <충효전>에는 香因山)에 천 년 묵은 청학(靑鶴)이 선동(仙童)으로 변하여 용궁의 보물을 훔쳐다가 준 것이요.” 하며, 보여 달라 하기에 보여 주니 그 노파가 보고서 “이것은 용궁 깊숙히 간직해 두었던 활과 화살인데 그 선동이 어떻게 훔쳐 갔는지 알 수가 없군.” 했다. 이에 대왕이 묻기를 “할머니께서는 그것을 어떻게 아셨습니까?” 하니, 그 노파가 대답하기를 “속세의 인간들이 내가 용녀(龍女)인 줄을 어떻게 알겠는가? 거룩한 천명이 장차 공의 자손에게로 돌아갈 것이다. 백호도(白虎刀 : <동국세기>와 <충효전>에는 白龍휢)를 전해 주려고 왔노라.”고 하면서 좋은 칼을 주므로, 대왕은 받고서 정면으로 바라보는 찰라에 그 노파는 사라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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