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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국내)/광주전라도

전남구례고택 나눔의 즐거움과 베품의 미학 운조루(한마리 새가되다) 여행

 

전남구례고택  나눔의 즐거움과 베품의 미학

구례여행 운조루(한마리 새가되다)

 

전남 구례군 토지면 오미리

1776년(영조52년)

 

운조루란 도연명의 귀거래사에서 따온것으로 추정된다.

우리나라 고택중 두번째로 국가지정문화재로 등록되고 조선후기 양반가 주택의 모습을 잘 나타내고있는 몇 안되는 건축물이다. 

 

운조루는 대구출신이며 당시 낙안부사였던 류이주가 건축했다. 1776년 상량식을 하고 6년후 그가 용천부사로 있을때 완성했다. 설계는 본인이 조카 덕호에게 짓게하였다.

 

류이주는 그가 처음 이사와 살았던 :구만들:의 지명을 따 호를 귀만(歸晩)이라 했으며 그의집을 귀만와(歸晩窩)라고도 불렀다.여러채가 연결되어 品자 모양을 갖춘 이 집은 안채,사랑채,행랑채,누마루채 및 방마다에 당호와 방의 별칭이 붙어있으나 전체를 일러 "운조루"라 한다.

 

 

▲운조루 배치도

 

 

▲ 운조루앞의 연못 

포근한 산자락을 뒤에 두고 집앞에는 연못이 있어

 풍수지리상 모든면을 갖추었음에 명당 인가보다.

 

운조루 앞의 이물은 지리산으로 부터

흘러내린다하는데 너무 맑고 깨끗하다.

 

 

        집의 구성은 총 55칸의 목조기와집으로

          사랑채, 안채, 행랑채,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랑채는 T자형이고 안채 통로까지 겸한 큰 부엌이 있으며

                  안채는 사랑채의 오른쪽에 있는 건물로 사랑채에 비해

              규모가 매우 크며 평면이 트인 'ㅁ'자형이다.

 

집앞의 산수유가 꽃망울을 터트리고있다

 

 

 

▲ 솟을대문

운조루를 찾으면 가장 먼저 길손을 맞이하는

 말뼈(처음엔호랑이 뼈)가   대문 위에 걸려있다.

 

 

운조루란 택호는

‘구름 속의 새처럼 숨어 사는 집’ 혹은 ‘구름 위로 나는 새가 사는 빼어난 집’이란 의미로

 고택은 지리산 산자락 아래 한 마리 새처럼 노닐듯 앉아있다.

 

그런데 이 운조루의 운(雲)과 조(鳥)는 도연명의

‘구름은 무심히 산골짜기에서 피어오르고 / 새들은 날기에 지쳐 둥우리로 돌아오네.’

라는 시구에서 따왔다고 전해온다.

 

 

 

 

 

 

 

누각에 앉아 앞의 계족산을 바라보며

명상에 잠겻을 옛 선비를 생각해본다.

 

 

 

▲ 사인교 가마 

 

▲  ‘타인능해(他人能解)’가 적힌 나무 쌀독

 

배려가 있었던 부자 

이 집의 정신의 사랑채에서 안채 사이에 놓인 이 쌀독에 있습니다.

타인능해(他人能解).가난한 이 누구든 열어도 된다'는 뜻이죠.

운조루에 사는 주인은 대를 이어 쌀독을 채우고 나누었습니다.

운조루가 거둔 곡식 20%는 나누었답니다.

후손들도 대를 이어 벼슬도 하고 잘 살았다네요.

 

운조루엔 높은 굴뚝도 없습니다.굴뚝을 낮추거나 감추었답니다.

흉년이 들면 모두 굶주리는데운조루 식구들만 밥먹겠다고 연기를 피워 올리면 안된다였죠.

이웃에 미안함과 두려워함도 깃들어 있답니다. 

 

격동의 시대인 해방 후.지리산엔 빨치산들이 숨어들었고

한국전쟁 때 인민군이 점령했다가 물러났죠.

집 운조루도 살고 있는 사람도 피해를 입지 않았다네요.

다 대를 이어 온 베품의 덕이었겠죠.

 

 

부엌에 서서 나란히 걸려있는 검은 가마솥 세 개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으려니

 옛 사람과 현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밥 짓는 소리가 되어 들려오는 듯했다.

 

사랑채가 아닌 유독 안채에 있는 장독대 

 

안채. 운조루

사람의 손길이 닿아야 이 집도 유지되는데......

 

 

시간의 흔적은 운조루에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며느리와 아이들의 공간이랍니다.

 

 

 

▲ 동문

 

▲사당 

운조루의 큰 사랑채입니다.

운조루는 이 사랑채 왼쪽에 달린 누각입니다.

 

집안에 흐르는 연못 

 

 운조루를 나오면서...

 

 

▼ 운조루 옆  오미마을 

 

▲ 오미정

 

한옥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