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생활 회고
1972년 입대하여 1975년 제대하기 까지
정말 말 그대로 파란 만장했다.
전화국에 근무하던 나는 입대 2개월 전
청주 형님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그 때부터 난 삶의 흐름이 깨져 버렸다.
객지생활 하면서 같이 자취하던 친구 3명
직장 친구들 영장 받은 후로 전에 보다 더 술자리가 잦아 졌다.
자취 방은 빈 소주병이 방 구석구석을 빙빙 돌고 있었다.
매일 서너 병 많이 묵으면 댓병 씪 마셨다.
그래도 출근은 끄떡 없이 잘했다.
한번도 병가 지각없었다. 젊음이 좋은것 같다.
술 잘 안하는 친구가 식사 당번은 많이 했다.
친구들아 미안해 ! !
1971년 처음 만나 데이트한 자야가
논산에 잠시 고향에 가서 있었다.
입대 전 직장은 동화사에서, 동문들은 화원 유원지에서 송별회를 했다.
입대 1주일전 동대구역에 가는데, 청우회원들이
동대구역에 전부 다 나와서 환송을 해주었다.
다른 사람도 그랬지만 감동이었다.
근데 아가씨도 졸지에 대전까지 같이 동행했다.
헤어지기 싫어서. 입대 전 대전에서 자야와 만나
대전 보문산에서 데이트도 했었지.
난 청주 집에, 안양사는 누나 집에도 가고, 보은 큰 누나에게 가서
입대 전날 누님과 속리산 문장대에 올랐다.
이제사 생각하니 젊음이 좋은것 같다.
바로 청주로 와서 대구 자야에게 전화하니 청주에 갔다고 한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청주 고향집에 들어가 보니 자야가 집 안방에 와 있지를 않는가?
놀라서 물어보니 자야가 나에게
청주시내에서 만나자고 전보를 쳤단다.
내가 보은 가서 있으니 청주 형님이 대신
고속터미날에 마중 나와 둘이 만났다.
차 1잔하고는 형님께서
“여기까지 왔으니 청주 집에 들어갔다 가시죠?
무심결에 어렵기도하고 하고, 그냥 쫄레 쫄레 뒤 따라 왔다고 한다.
비는 억수같이 쏟아 지는데 삼계탕 파티도 하고,
아버지 어머니에게 큰절하고,
형님 형수도 보고, 동생도 보고. 결혼 전에 보고 다행이다.
아침밥 먹고 자야는 어머니가 차 태워주어 대구로 가고 난 훈련소로 갔다.
그 때부터 신병훈련이 시작되었다.
6월 중순이니 한 여름 정말 많이 더웠다.
육군의 기본 제식훈련부터 총검술 사격훈련
야간훈련 행군 태권도 구보에 선착순
산타크로스(옷 전부 다 입고 장비 방독면 씀: 한여름에~)
정말 힘들어 일부 동료들이 쓰러지기도 했다.
훈련중 자야 생각하고 한눈 팔다가 소대장에 걸려
M1총을 “이빨로 총 들어” 기합을 받았다.
(이가 시리고 아파 3일 동안 밥도 먹기 힘들었다.)
7월말 6주 훈련 무사히 마치고
이등병 작대기 두개 달고 부산으로 가게 되었다.
200 여명 훈련 동기생 떠블 빽 미고
거의 전우들은 101보 103보 최전방부터 가고
우린 제일 후미로 증평역으로 행진하니
엄마와 큰 형님이 나를 계속 부르고 있었다.
조치원에서 기차가 오랫동안 머문다 하니
두분이 택시타고 조치원까지 오셨다.
형님께 돈을 좀 받았는데, 안동 모 중사한테 일부를 빼앗겼다.
대구 좀 가니 호송병들이 술이 취해 떨어져 자고 있었다.
동기생 동수(동국대 야구선수)와 소주 3병이상 먹었다.
부산에 도착하여 보충대에 전입 됐다.
월남에서 귀국한 장병들 헌병들 사고병들과
3일동안 같이 있는데
난 취사병으로 작업가서도 잘 묵고 해서 그런지
훈련받느라 기름기가 다 빠졌는지
소주를 오랫만에 많이 마셔
밤새 설사를 하여 기합 받느라고 죽을뻔 했다
군수사령부 예하부대에 전입되었다.
주특기는 병참행정이지만 후반기 교육을 안 받아서
영선반에 전공을 받았으나 사수가 있어
난 야전공병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씨멘트 모래 토목 목수 페인트 수도 전기 등
힘든 일 (일명 노가다) 정말 많이 했다.
그렇게 피곤해도 아침에 일어나면 몸은 가벼웠다.
그게 젊음인 것 같았다. 8월 동백섬에 1주일 입교했다.
광복절날 해운대 해수욕장에
바다의 캬니발 여왕을 뽑는다나 뭐래나??
정말 눈으로 밖에 보니 비키니 입은 아가씨들 보니
눈이 휙 돌아가 버리겠다. 휘파람 불어대는 동료들.
밖에 교육대장이 있었나보다.
대장이 부대로 전화와서
광복절 특식은 고사하고 인분사역 등
하루종일 기합도 받고 평생 안 잊혀진다.
훈련마치고 3개월만에 일병 진급
밤마다 야전 삽 등으로 빨리 맞아야 잠을 잘 잤다.
라면 하루에 열 댓개 끓이면 밤에 무연탄 갈탄 난로불이 꺼진다.
고참들이 한 밤중 불피우면 시끄럽고 먼지난다고
또 기합에 두드려 맞고, 우우우~
스피아 깡에 물(장군숙소 정화조 똥물)에 라면 끓여 주기도. ㅋ ㅋ
근데 10월 유신 정훈교육 덕분에 약 두달 간 매일 취침점호에
특식 영화 외출 외박 쫄병 생활 한 두달은 편하게 함.
해가 바뀌어 73년 3월 첫휴가 25일. 부모님 모시고 서울에 갔다.
독립문(이모집)에서 누님 사당동집 가는데
버스 잘못 타 2시간 걸렸다우 우~
작은형 집 천호동도 가고 누나(문자)집에 감. 휴가 끝.
올때 대구에 오니 자야가 백설기 떡해 줌.
부대 후문에서 들어가기 싫어 두 세번
들어갈까 말까 하다가 부대에 간신히 들어갔다.
73년 상병 진급(월남 병장 전체 철수로 말뚝 상병 24개월 담)
유격 공수훈련(해운대) 3번, 7일씩 3주간
1973.10 내 동생 원이 죽다.
엄마와 큰 형님이 편지 5-6장 빽빽히 글을 써서 편지가 왔다.
동생이름으로 내가 편지를 보내니 어머니 마음이 아파하셨다 한다.
부대 보고하니 이왕 동생 죽었으니
작은 형 결혼식에 가라면서 그때 1주일 청휴~
청주에 가서 울도 못하고(작은형 혼사로 울도 못하게함)
1973. 11월 형 결혼식 참석하고 나서
누나 두분과 청원군 주중리에 원이 산소 둘러보구 오열 통곡함
1974년 부대가 군수사로 변경되어 동래로 전출을 갔다.
아버지 돌아가셔서 관보 보냈으나 2관구로 배달되어 바로 못 봄
장례식도 못 보구 삼우제만 봄. 불효가 됐다.
28개월하고 나머지 6개월.
미치겠다. 한달 여 고생했지만 교환병으로
내무생활 면해줘 편하게 마무리
제대할 때 문관 오양 도움을 받았는데
제대후 대구 동화사 구경시켜 달라며 날 좋아했나보다.
팔공산 구경시켜주고 그냥 보내 주었다
.
1975.1 오창 큰 누나 돌아가심
1.22 말년 휴가 출발 했는데
큰형 어머니 미리 누나 장례식 다녀 왔단다.
빈소도 없고 장티푸스인데 밥 굶고 자살 했다한다.
누나 두분과 작은형 넷이서 오창 장터에서 막걸리 실컷 마시고
누님집에 가보니 빈소도 없고 성질나서 누님이 너무 불쌍해서
매형을 신나게 패주었다. 동네 사람들도 구경만 하고~
경사가 급히 진 깔빡 진 데 산소에 성묘하고 오다.
1975. 4 제대 출발, 술을 선임하사와 많이 마셨다.
저녁에 만취상태가 되어 자야 만나고
택시타고 자야 집에가서 잤다.
새벽에 청주로 줄 행랑 도망 가다시피 갔다가
부대로 바로 들어갔다.
훈련 같이 받은 친구들 만냈다. 동기 선후배도 있고.
훈련 동기들은 땅굴 최전방 땅굴 얘기
난 여군 팬티 훔친 거 말고는 할 이야기도 없어.
75.4.17 크메르 공산화 되고
75.4.30 월남도 공산화 되었다 한다.
제대 취소되고 자대 들어 복귀할지도 모른다면서
선임하사 공갈 협박~~
(평생 군대 다시 들어가는 꿈을 많이 꿈)
그래도 5.1일자 강서가서 쪼끄만 쪼가리 전역증.
주민등록증 만 함 와 3년 고생 정말 많이 했는데
겉에 비닐도 없이 국방부 너무 성의 없다.
정말 미치겠네. 제대 만기 전역했다. 고생했다.
누나 동생 아버지 돌아 가시고
제대 1년 후 어머니 화병으로 돌아가시다.
4년동안 4번 변고를 치루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