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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북치등 종중

[스크랩] 제28세 혼(渾)

제28세 승지공(承旨公) 혼(渾)

고림군의 장자 칠산군의 3자로 태어났으나 4째 숙부인 담손(聃孫) 밑으로 입양하였다. 

칠산군(漆山君)

제1자 환(渙)

제2자 형(泂)

제3자 혼(渾) 담손(聃孫)밑으로 입양

제4자 수(洙)

제5자 연(演)

제6자 옥(沃)

서기 1513 중종8 계유년 출생

배위  贈 숙부인 (淑夫人)풍산심씨(豊山沈氏)

모소 : 淳昌郡 東溪面 內靈溪 楓岳山下 竹房洞 卯坐 上下封

 

 

 

 

 

 

 

 

 

 

 

 

 

 

 

 

 

 

 

 

 

 

 

 

 

 

 

휘:혼(渾)  승지공(承旨公)         중종8년(1513~1576)선조9년  64세

配 풍산 심씨(豊山沈氏)               공묘: 상 하봉

 

■  묘비문 : 국역문

증  통정대부  승정원  좌승지 겸 경연 참찬관  이공 혼 지묘

중  숙  인   풍산심씨  부

 

공의 성은 이씨요, 휘는 혼(渾) 자는 혼연(渾然)이시다. 아버지는 휘  담손은 춘성정이시고 할아버지 휘 훈은 고림군이시고 증조 휘 친은 서원군이시고 고조는 효령대군 휘 보이시니 곧 우리 태종대왕의 둘째 아들이시다. 어머니는 순천김씨로 사직을 지내신 휘 만보님의 따님이시다. 순천김씨 집안이 남원(둔덕방)이기 때문에 공께서 내려와 사셨다.

생가 아버지는 칠산군 휘 선손이신데 춘성저의 큰 형님이시고 생모는 현 부인에 증직되신 밀양박씨로 주부 찬의 따님이시다. 부인은 숙부인에 증직되신 풍산심씨로 찰방 언통의 따님이시다. 아들 대윤은 문과로 정랑인데 참판에 증직되었고, 담은 경윤 다음 희윤이 잇고 사위는 좌랑 이 대유이다. 장손 엽이 원종 공신에 녹훈되니 공께서  좌승지겸 경연 참찬관에 증직되셨고 묘는 남원부 서영계 죽방동 묘좌에 계신다.    

 숭 정 병 술 (숙종32년 병술 1706년)  오세손 태제쓰다.

 

(신비)

공의 휘는 혼이요 자는 혼연이시다. 고조는 효령대군 시호가 정효공이시며 별자로 이어지니 태종대왕의 둘째 아들이시다. 증조는 서원군 위 친이시고 시호는 이안이시다. 할아버지 고림군 휘 훈께서 네아들을 두셨는데 그중 두아들인 칠산군 휘 선손과 춘성정 휘 담손이신데 공께서 춘성정의 후사가 되셨다.

생부 칠산군은 재종 형님되시고 공에게는 증조부되시는 주계군에게서 배워 경학에 밝아 세상에서 중히 여겼는데 참혹한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형제가 같이 남쪽으로 내려와 남원(둔덕방)에 살게 되었고 가까이에 묘소를 모셨다.

공은 중종8년(1513)에 태어나시니 어머니는 순천김씨로 사직 만보의 따님이시고 생가에는 두분 어머니가 계신데 고령신씨 귀래정 말주의; 손녀와 밀양박씨 정종의 부마 갱의 증손녀인데 공은 박씨 소생이시다. 이미 장성하여 다시 고향집(둔덕리)에 내려와 졸하시니 선조9년(1576)11월13일이요 육십사세를 사셨다. 남원부 서 영계 풍악산아래 묘좌에 장례를 모시고 오대손 태제사 쓴 옛비가 있는데 오래되어 희미해지고 글씨를 알아볼수없어 육세손 이근이 이어서 묘가 무너져 묻히거나 변형이 되지 않도록 갖추었다.

부인 풍산 신씨는 찰방 언통의 따님으로 아들 셋을 두었는데 대윤은 문과에 급제하여 사성에서 정랑에 이르고 임진왜란에 군량을 공급한 공으로 참판에 증직되셨고 경윤은 충의위이고 희윤은 막내이고 경주 이대유는 사위인데 유일로 천거되어 좌랑이다. 장방손 엽은 원종공신에 녹훈되어 병조판서에 증직되었고 공께서 좌승지에 증직되신것도 이에따라 추존된것이다. 둘째아들 소생 손자는 욱이고 딸은 정두준에게 출가하였다. 엽의 아들 유형은 성균관 진사로 다시 의금부도사로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안했고 국형은 숭의랑이고 지형은 승선랑으로 사복시 정에 증직되고 필형은 충의위이고 딸들은 부사인 최보와 진사 고부량 찰방 성전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욱의 아들 상형은 문과로 홍문관 교리요 일찍아 사계 김선생에게서 배웠고 병자호란에 의병척화로 난후에 이조판서에 양과(홍문관 예문관)제학을 증직받으시고 시호는 충경이고 여러 조정에서 대우를 받았다. 작은집 소생 인형은 첨지중추부사이고 종형은 참봉이다.

지금에 이르러 자손이 천여명이다. (공의)세대가 오래되어 그 지조와 행실을 징험할수없다. 지금은 오래되어 알수없으나 공은 왕실의 가까운 종친으로써 대궐에 의지하여 가까이 할수잇고 마음만 먹으면 총애와 영화가 굴러들어 올터인데 하루아침에 훌쩍 시골에 숨기로 작정하니 이는 자손들을 편히 먹여살리려는 뜻이 충만하여 묵묵히 사는 가운데 곱게 늙어 임천에서 세상을 마치시다.

세상에서 숨어살돠  답답해 하지않고 높은 관작을 가벼히 여기고 부귀를 뜬구름처럼 여기는것은 군자로서 할수없음이 아닐진대 이로부터 학문과 행실이 대를 이어 덕이 되고 과거와 벼슬이 이어져 크고 작은 증직이나 음사가 주어지니 손가락으로 셀수가없다. 오늘날에 이르러 성현을 배우고 인의를 논해보면 조정의 파란 곡절들이 조금도 우리에게 미치지아니함은 모두 공께서 끼치신 은혜이다.

이로써 옛 어른의 일을 논함에 잇어 어찌 밝게 드러내어 밝히지 않으리오.!

이제 여러 자손들이 그 비석을 새롭게 다시 세울 방법을 이논하니 삼가 그 근본을 서술하고 세상에서 공을 칭송하는 바가 이 같음을 덧붙인다.

개국 오백 이십삼년 갑인(1914) 시월  일

십이세 손 통정대부 봉의 근찬

행 비서원 비서승 규의 근서

 

 

 

 

 

출처 : bloglkh7700
글쓴이 : 삼봉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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