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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조상(직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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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제7세(世) 염순(廉順) 제7세(世) 염순(廉順) 6세 긍휴공의 아들로 이름은 염순이며, 벼슬은 생원(生員), 호장(戶長)을 지냈다. 배위는 첨대정승(僉隊政丞) 정익조(鄭翼祚)의 딸이다. `생원'은 옛날 소과(小科) 종장(終場)에서 경서(經書)의 뜻을 묻는 시험에 합격한 사람을 말한다. `호장'은 조선 시대에는 지방 관아의 육방(六房) 중의 하나로 낮은 벼슬이었으나, 고려 시대에는 향리(鄕吏)의 으뜸 구실로 당대등(堂大等)이라고도 했는데, 요사이의 지방 자치 단체의 장쯤에 해당하였다. 에는 염순공에 대한 일화가 없고, 와 에는 다음과 같은 긴 이야기가 전한다. 이 두 책에서는 염순공이 철중(鐵中 : 哲重)으로 나온다. `그는 7형제 중 맏형(또는 중간)이었는데, 나머지 6형제는 모두 농아였고, 혼자만 준수하고 문장에 능하여, 2..
[스크랩] ?제?6세(世) 긍휴(兢休) 제6세(世) 긍휴(兢休) 5세 입전공의 아들로 이름은 긍휴요, 처음으로 고려에 벼슬하여 사공(司空)을 지냈다. 배위는 정언(正言) 벼슬을 지낸 이대광(李大光)의 딸이다. 고려 시대의 `사공'은 삼공(三公)의 하나로 정1품이었는데, 임금의 자문에 응하고 나라를 대표하는 관직이었다. 또 `정언'은 고려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의 낭사(郞舍) 벼슬로 종6품이었다. 임금에게 간언(諫言)을 올리는 일을 맡았었다. 에는 이런 일화가 곁들여 있다. `긍휴공은 중국에 건너가 26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예천태수(醴川太守)가 되었다가, 7년 후에 우리 나라로 돌아와 몇 해 동안 계시다가, 다시 중국으로 들어가 관사재(觀史齋)에 계시다가 객사하셨다. 이에 부인 이씨가 7세가 된 아들 염순(廉順)을 데리고 중국 조정에 밤낮으로 ..
[스크랩] 제5세(世) 입전(立全) 제5세(世) 입전(立全) 4세 광희공의 아들로 이름은 입전이요, 벼슬은 사도(司徒)를 지냈다. 배위는 한림(翰林) 백광선(白光善)의 딸이다. 에는 입전공의 벼슬이 삼중대광사도(三重大匡司徒)요, 이 입전공부터 고려의 벼슬을 하기 시작했다고 하였다. `사도'란 고려 때 삼공(三公 : 司馬 · 司徒 · 司空)의 하나로 정1품이었으며, 삼사(三師)와 더불어 임금의 고문이었다. 원래는 `삼중대광' 혹은 `벽상삼한(壁上三韓)'이란 품계가 있었는데 `사도'가 높은 벼슬이기 때문에 앞에 이런 품계명을 덧붙여 `삼중대광사도'라고 부른 듯하다. `한림'은 한림학사(翰林學士)의 준말로 고려 때 한림원(翰林院)에 소속된 정4품의 관직이었다. 에는 입전공의 일화가 없고 에는 입전공이 문옹(文雍)으로 표기되어 나오는데, 8형제 ..
[스크랩] 제?4세(世) 광희(光禧) 제4세(世) 광희(光禧) 3세 천상공의 아들로 이름은 광희요 아간(阿干)을 지냈다. 배위는 대장군 황지선(黃志善)의 딸이다. `아간'이란 벼슬은 `아척간(阿尺干)', `아찬'이라고도 하는데 신라 17 등 관계의 제6위였다 한다. 광희(光禧)를 에서는 `광희(光喜)'로 쓰기도 한다 했다. 태조고황제의 친구였던 이색(李穡 : 1328∼1396)이 지은 에는 `전주리씨는 대성(大姓)으로 신라 아간 `광희'가 사도삼중대광(司徒三重大匡) 입전(立全)을 낳고…'라고 하여 우리 시조를 `광희'로 보았으나 이는 잘못된 것이다. 에는 별다른 일화가 없고, 와 에는 세직(世稷 : 世直)으로 시조를 삼아 중국 당나라 종실로 있다가 우리 나라로 건너와 전주에 세거하며 우리의 시조가 된 양으로 기록해 놓았다. 그것이 세대로는 ..
[스크랩] 제3세(世) 천상(天祥) 제3세(世) 천상(天祥) 2세 자연공의 아들로 이름은 천상이요 벼슬은 복야(僕射)를 지냈다. 배위는 시랑(侍郞) 벼슬을 지낸 영일정씨 습명(襲明)의 딸이다. `복야'란 원래 중국의 당(唐) · 송(宋) 때 재상의 별칭인데, 고려 시대는 정2품으로 부총리에 해당한다 하였다. 고려 시대 관직으로 지칭한 것이리라. 장인인 영일정씨의 관직 시랑(侍郞)은 신라 · 고려 때 관직으로 오늘날의 차관에 해당한다. 에는 이런 기록이 전한다. 천상공은 젊어서 매우 호탕하였는데, 늦게 이치를 궁구하는 일을 좋아해서, 중국으로 건너 가 중앙관서에 들어가셔서 천문지리를 연구하다가 9년만에 천문지리에 달통하여서 만물의 이치를 깨달은지라, 우리 나라로 돌아와서 완산부(完山府) 기린산(麒麟山) 왕자봉(王字峯) 밑에 산소 자리를 잡고..
[스크랩] 제2세 자연(自延) 제 2세(世) 자연(自延) 시조 한(翰)공의 아들로서 이름은 자연(自延)인데 에는 자연(子延)으로 표 기되어 있다. 시중(侍中)을 지냈다. 배위는 진양군(晋陽君) 윤자인(尹自仁)의 딸이다. 에는 자연공이 신라 경순왕 때 시중을 지냈다고 하였다. 그러나 한(翰) 시조공이 신라 경덕왕(742∼764 在位) 때 살았는데, 경순왕(927∼935 在位) 때까지는 170여 년이나 간격이 생기니 30년이 1세대라는 통념으로 보아서는 너무나 떨어져 있다. 따라서 경순왕 때 살았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자연공이 지냈다는 `시중(侍中)'이란 벼슬은 요사이 내각의 국무총리에 해당하는 직책이다. 그러나 배위인 윤씨의 아버지 윤자인의 봉군호(封君號)인 진양군(晋陽君)은 후세의 군호로 후대에 올려 기록한 것일 것이다. 출..
[스크랩] 제1세 시조공(始祖公) 第 1世 시조공(始祖公) 제1세 시조공 우리 전주이씨의 시조의 휘(諱)는 한(翰)이요, 호는 견성(甄城)이다. 신라의 사공(司空)벼슬을 지냈다. 배위(配位) 경주김씨는 신라 태종무열왕의 10세손 군윤(軍尹) 은의(殷義)의 딸이다 전주(全州)의 연혁(沿革) 지금의 전북 도청 소재지인 전주시는 본래 백제의 완산(完山 : 比斯我 · 比自火)으로 554년(백제 위덕왕 1) 주를 두어 완산주(完山州)라 하였다가 565년(위덕왕 11)에 주를 폐하 였다. 백제가 신라에게 망한 뒤인 685년(신라 신문왕 5)에 주를 두어 다시 완산주로 하였다 가 757년(경덕왕 16)에 지금의 전주로 개칭하였다. 그후 효공왕 때 견훤이 이곳에 도읍을 정 하고 후백제라 칭하더니 936년(고려 태조 19) 후백제의 신검(神劒)을 토벌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