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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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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제9세(世) 충경(充慶) 제9세(世) 충경(充慶) 8세 승삭공의 아들로 이름은 충경인데, 에는 광경(光慶) 혹은 극경(克慶)으로 적기도 한다고 했고, 에도 충경(充慶)으로 씌어 있다 한다. 벼슬은 생원이다. 배위는 생원 윤자필(尹自必)의 딸이다. 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충경공은 초년에 집안이 몹시 가난하여 유리걸식의 지경이었는데, 지관(地官) 김지원(金志元)이라는 이가 와서 “선대 조상의 산소가 흉지에 잘못 모셔져 있기 때문에 이렇게 고생하는 것이오.” 하므로, 그와 함께 향린산으로 올라가 산맥을 살펴보았는데, 김지원이 말하 기를 “7∼8대에 이르러는 멸망하고 말 땅이니, 마땅히 천장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그렇다면 마땅한 땅이 어디에 있소?” 하니, 대답하되 “청령산(靑嶺山) 밑에 5대에 걸쳐 서 삼공(三公)이 날..
[스크랩] ?제8세(世) 승삭(承朔) 제8세(世) 승삭(承朔) 7세 염순공의 아들로 벼슬은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생원 호장이었다. 배위는 시랑(侍郞) 백광현(白光賢)의 딸이다. `시랑'은 고려 때 육부(六部) 또는 육조(六曹)의 버금 벼슬로 조선조 때 참판(參判) 곧 요사이의 차관에 해당된다. 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승삭공은 어려서부터 부모에게 지극한 효성을 다하여 사람들이 동방의 효자라 칭했다. 나이 67세에 문과에 급제했는데, 향린산(香麟山)에 올라가 산맥을 보고 돌아오다가 청평산 (靑平山) 아래에 이르러 객사하였다. 왕이 예관(禮官)에게 명하여 호상(護喪)케 하고, 시호를 문효(文孝)라고 내렸으며, 서원에다 모시게 했는데 고려 말에 이르러 없어졌다.' 와 에도 같은 내용이 적혀 있는데, 승삭이 화선(和善 : 和先)으로, 60세에 ..
[스크랩] ??제7세(世) 염순(廉順) 제7세(世) 염순(廉順) 6세 긍휴공의 아들로 이름은 염순이며, 벼슬은 생원(生員), 호장(戶長)을 지냈다. 배위는 첨대정승(僉隊政丞) 정익조(鄭翼祚)의 딸이다. `생원'은 옛날 소과(小科) 종장(終場)에서 경서(經書)의 뜻을 묻는 시험에 합격한 사람을 말한다. `호장'은 조선 시대에는 지방 관아의 육방(六房) 중의 하나로 낮은 벼슬이었으나, 고려 시대에는 향리(鄕吏)의 으뜸 구실로 당대등(堂大等)이라고도 했는데, 요사이의 지방 자치 단체의 장쯤에 해당하였다. 에는 염순공에 대한 일화가 없고, 와 에는 다음과 같은 긴 이야기가 전한다. 이 두 책에서는 염순공이 철중(鐵中 : 哲重)으로 나온다. `그는 7형제 중 맏형(또는 중간)이었는데, 나머지 6형제는 모두 농아였고, 혼자만 준수하고 문장에 능하여, 2..
[스크랩] ?제?6세(世) 긍휴(兢休) 제6세(世) 긍휴(兢休) 5세 입전공의 아들로 이름은 긍휴요, 처음으로 고려에 벼슬하여 사공(司空)을 지냈다. 배위는 정언(正言) 벼슬을 지낸 이대광(李大光)의 딸이다. 고려 시대의 `사공'은 삼공(三公)의 하나로 정1품이었는데, 임금의 자문에 응하고 나라를 대표하는 관직이었다. 또 `정언'은 고려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의 낭사(郞舍) 벼슬로 종6품이었다. 임금에게 간언(諫言)을 올리는 일을 맡았었다. 에는 이런 일화가 곁들여 있다. `긍휴공은 중국에 건너가 26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예천태수(醴川太守)가 되었다가, 7년 후에 우리 나라로 돌아와 몇 해 동안 계시다가, 다시 중국으로 들어가 관사재(觀史齋)에 계시다가 객사하셨다. 이에 부인 이씨가 7세가 된 아들 염순(廉順)을 데리고 중국 조정에 밤낮으로 ..
[스크랩] 제5세(世) 입전(立全) 제5세(世) 입전(立全) 4세 광희공의 아들로 이름은 입전이요, 벼슬은 사도(司徒)를 지냈다. 배위는 한림(翰林) 백광선(白光善)의 딸이다. 에는 입전공의 벼슬이 삼중대광사도(三重大匡司徒)요, 이 입전공부터 고려의 벼슬을 하기 시작했다고 하였다. `사도'란 고려 때 삼공(三公 : 司馬 · 司徒 · 司空)의 하나로 정1품이었으며, 삼사(三師)와 더불어 임금의 고문이었다. 원래는 `삼중대광' 혹은 `벽상삼한(壁上三韓)'이란 품계가 있었는데 `사도'가 높은 벼슬이기 때문에 앞에 이런 품계명을 덧붙여 `삼중대광사도'라고 부른 듯하다. `한림'은 한림학사(翰林學士)의 준말로 고려 때 한림원(翰林院)에 소속된 정4품의 관직이었다. 에는 입전공의 일화가 없고 에는 입전공이 문옹(文雍)으로 표기되어 나오는데, 8형제 ..
[스크랩] 제?4세(世) 광희(光禧) 제4세(世) 광희(光禧) 3세 천상공의 아들로 이름은 광희요 아간(阿干)을 지냈다. 배위는 대장군 황지선(黃志善)의 딸이다. `아간'이란 벼슬은 `아척간(阿尺干)', `아찬'이라고도 하는데 신라 17 등 관계의 제6위였다 한다. 광희(光禧)를 에서는 `광희(光喜)'로 쓰기도 한다 했다. 태조고황제의 친구였던 이색(李穡 : 1328∼1396)이 지은 에는 `전주리씨는 대성(大姓)으로 신라 아간 `광희'가 사도삼중대광(司徒三重大匡) 입전(立全)을 낳고…'라고 하여 우리 시조를 `광희'로 보았으나 이는 잘못된 것이다. 에는 별다른 일화가 없고, 와 에는 세직(世稷 : 世直)으로 시조를 삼아 중국 당나라 종실로 있다가 우리 나라로 건너와 전주에 세거하며 우리의 시조가 된 양으로 기록해 놓았다. 그것이 세대로는 ..
[스크랩] 제3세(世) 천상(天祥) 제3세(世) 천상(天祥) 2세 자연공의 아들로 이름은 천상이요 벼슬은 복야(僕射)를 지냈다. 배위는 시랑(侍郞) 벼슬을 지낸 영일정씨 습명(襲明)의 딸이다. `복야'란 원래 중국의 당(唐) · 송(宋) 때 재상의 별칭인데, 고려 시대는 정2품으로 부총리에 해당한다 하였다. 고려 시대 관직으로 지칭한 것이리라. 장인인 영일정씨의 관직 시랑(侍郞)은 신라 · 고려 때 관직으로 오늘날의 차관에 해당한다. 에는 이런 기록이 전한다. 천상공은 젊어서 매우 호탕하였는데, 늦게 이치를 궁구하는 일을 좋아해서, 중국으로 건너 가 중앙관서에 들어가셔서 천문지리를 연구하다가 9년만에 천문지리에 달통하여서 만물의 이치를 깨달은지라, 우리 나라로 돌아와서 완산부(完山府) 기린산(麒麟山) 왕자봉(王字峯) 밑에 산소 자리를 잡고..
[스크랩] 제2세 자연(自延) 제 2세(世) 자연(自延) 시조 한(翰)공의 아들로서 이름은 자연(自延)인데 에는 자연(子延)으로 표 기되어 있다. 시중(侍中)을 지냈다. 배위는 진양군(晋陽君) 윤자인(尹自仁)의 딸이다. 에는 자연공이 신라 경순왕 때 시중을 지냈다고 하였다. 그러나 한(翰) 시조공이 신라 경덕왕(742∼764 在位) 때 살았는데, 경순왕(927∼935 在位) 때까지는 170여 년이나 간격이 생기니 30년이 1세대라는 통념으로 보아서는 너무나 떨어져 있다. 따라서 경순왕 때 살았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자연공이 지냈다는 `시중(侍中)'이란 벼슬은 요사이 내각의 국무총리에 해당하는 직책이다. 그러나 배위인 윤씨의 아버지 윤자인의 봉군호(封君號)인 진양군(晋陽君)은 후세의 군호로 후대에 올려 기록한 것일 것이다. 출..